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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21] 한글날, 시각차별하지 맙시다

    2020-10-1550

  • 9월29일 서울 고려대학교 산학관 디올연구소 사무실에서 이종근 대표가 저시력자·고령자를 위한 글꼴인 ‘디올폰트’의 개발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승준 기자

    ‘디올 폰트’ 글꼴로 작성된 기사를 <한겨레21> 1335호 지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다. 글자를 본다.
    문장을 훑는 숙련된 독자의 안구는 0.2~0.4초 간격을 두고 멎고(보고) 움직이기를 반복한다.(단속성 운동) 그렇게 보는 건 띄엄띄엄 글자 몇 개뿐.(통상 10자 중 3~4자) 본 것을 잇고, 못 본 것을 추정해 의미를 이해한다. 어차피 보지 않은 글자를 차라리 생략해버린다면? 문장은 그저 불완전한 몇 단어의 나열이다. 의미는 사라진다.
    이제 잠깐 잡지를 덮고.
    방금 본 글자 모양을 떠올릴 수 있을까? 연구 결과는 대부분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윤명조130 글꼴로 적힌 <한겨레21> 지면 본문 글꼴이 실수로 뒤바뀐다면? 독자 항의가 빗발칠 수 있다. 글꼴이 바뀐 기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글을 읽는다. 글자를 본다. 낱낱이 있을 때 알아챌 수 없던 것들이 한데 모여 일상을, 정보를, 생각을 바로 전한다. 세계를 짓는다. 신비한 일이다.
    한글날 즈음, 한글꼴 세 개와 거기 얽힌 사람들을 만난다. 비장한 마음으로, 애틋한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각자의 글자를 말한다. 둥근 줄기와 가로 줄기와 기둥과 그 사이 공간… 너무 작은, 낱낱이 흩어진 획과 획 사이 어떤 마음은 기어코 전해진다. 또한, 신비로운 일이다._편집자주
    참고 문헌: 헤라르트 윙어르 <당신이 읽는 동안>, 요스트 호훌리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회사를 다녀요?” 1990년대 중반, 서울 강서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이종근(53)씨는 장애인 면허 시험장에 줄을 선 이들에게서 비슷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100여 명 가운데 직장인 행색을 한 장애인은 자신을 포함해 두어 명에 불과했다. 그는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에 철제 보조기기를 착용하고 생활하는 지체장애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장애인 회사원’은 낯선 존재였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닐 때였어요. 제가 잘해서 회사를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장에 모인 장애인을 보니 ‘내가 참 특별한 케이스구나,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면허시험장에서 느꼈던 ‘부채감’이 마음 한쪽에 쌓여갔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컴퓨터그래픽을 일찍 접한 그는 30대 초반 회사를 그만두고 정보기술(IT) 벤처 창업을 했다. 교육용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 콘텐츠 사업 등에 뛰어들어 꽤 성공했다고 한다. 그래도 “장애인이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 자리잡았다.

     

    2017년 숙제를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치매를 앓던 아버지의 급격한 변화를 보며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장애, 고령화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는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 폰트’(UD폰트)가 눈에 들어왔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란 연령, 성별, 국적, 장애 유무 등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디자인을 뜻한다. 글꼴 디자인에선 저시력자·고령자를 위한 일본의 이와타 서체, 난독증 독자를 위한 네덜란드의 디슬렉시(Dyslexie) 서체 등이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도 몇 차례 서체를 개발했지만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는 노안, 저시력자를 위한 글꼴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다. 마침 그에게도 노안이 찾아오고 있었다.

     

    9월29일 서울 고려대학교 산학관에서 만난 서울시 예비사회적기업 ‘디올(Design for all의 줄임말,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뜻)연구소’ 이종근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건축 분야에선 장애인이나 고령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은 법적으로 강제하며 많은 발전이 이뤄졌어요. 이제는 글꼴도 그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시력자나 노안을 겪는 이들에겐 글자가 뭉쳐 보이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일이 많다. ‘ㅃ’ 같은 쌍자음이나 ‘ㅞ’처럼 획이 많은 글자일수록 알아보기 힘들다. 작은 글씨는 더 그렇다. 디올연구소는 먼저 고령자, 저시력자, 디자인·마케팅·서체 전문가 등에게 글자를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글꼴을 만들고 다시 사용자에게 평가받았다. 다섯 차례 사용성 평가를 거쳐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디올폰트’다. 일반 글꼴은 개발하는 데 보통 5개월 안팎이 걸리지만, 디올폰트는 이 대표와 개발자 5명이 1년을 매달렸다. “일반 글꼴은 예쁘게 만들거나, 마케팅 트렌드에 맞춰 개발돼요. 디올폰트 같은 기능성 폰트는 글꼴의 가독성과 판독성이라는 관점에서 일반 글꼴과 다른 변별력을 확보하는 과정이 어려워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글꼴이 사용될) 시장이 없다보니 다들 잘 접근을 안 하죠.”

    디올연구소 제공

     

    개발자 5명이 1년 매달려

     

    글자를 크게 하고 글꼴을 두껍게 하면 저시력자나 고령자들의 불편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대표는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 작은 글씨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식품의 성분표, 약품 설명서 등에 주목했다. 그는 미국·영국·일본과 우리의 식품 성분표를 꺼내 보여줬다. “외국은 소비자가 보기 편하게 디자인하거나 UD폰트를 적용해요. 우리는 식품의약품안전처 기준에만 맞춰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표시하죠. 시력이 좋은 분도 읽기 불편해요. 저시력자, 고령자의 불편을 제거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디올폰트는 작은 면적에서 글자가 뭉쳐 보이는 현상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다. 획이 맞닿는 부분에 작은 홈을 파는 잉크트랩 방식(그림 참조)을 적용했다. 잉크트랩은 과거 종이 질이 좋지 않던 시절, 잉크 번짐을 고려한 기술이다. “노안이 오면 뿌옇게 흐려지면서 획이 맞닿는 면이 뭉개 보여요. 잉크가 번진 글자처럼요. 지금은 인쇄물 잉크가 번지지 않지만, 저시력자에게는 잉크트랩이 여전히 의미가 있겠더라고요.”

     

    한 글자 안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기도 했다. “글자 속 공간이 좁으면 전체가 어두워요. 개발자에게 자소(글자의 최소 단위) 사이의 흰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라고 했어요. 우리 서체가 좀더 밝아 보이는 이유예요.” 좁은 면적에 많은 글자를 넣을 경우 일반 글꼴의 장평(글자폭)과 자간을 물리적으로 줄이면 글꼴이 변형되고 겹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디올폰트는 좁은 공간에서 잘 보이는 장평의 최적값을 찾아 적용하기도 했다. “글씨 크기를 키우면 한 장에 볼 수 있는 것을 2~3장으로 보는 건데 불편하고, (종이 인쇄량이 늘어나니) 환경적으로도 문제가 있죠. 같은 크기에서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쏟은 거예요. 무조건 글씨를 키우자는 건 단순한 접근이에요. 고령자나 저시력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편리할까? 이렇게 접근한 거죠.”

     

    공급자 시각의 서체를 벗어나라

     

    디올폰트는 현재 50여 곳의 기업에 판매됐다. 삼성카드의 약관·상품 설명서와 사회적경제기업, 소셜벤처기업 등의 서비스를 소개하는 인쇄물과 제품, 출판사의 출판물에 활용되고 있다. 디올연구소는 국내에서 UD폰트가 실제 상품에 활용된 것은 디올폰트가 처음이라고 밝힌다.

     

    “비용이 더 들고 기존에 사용하던 디자인도 새롭게 변경해야 해서 디자이너들이 번거롭게 느끼다보니 저희 글꼴을 적용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시각이 많아요. 일본은 UD폰트가 공공기관이나 기업을 통해 보급되며 활성화됐는데 우리는 고령자나 장애인에 대한 공감도가 여전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건 공급자 위주의 시각이라고 생각해요.” 이 대표는 앞으로도 한글을 둘러싼 시각적 불편을 해결하는 일을 계속하려 한다. 고령자도 많이 보는 유튜브 영상 자막, 내비게이션 글씨, 다양한 건강정보 등에 저시력자와 고령자를 위해 특화된 글꼴을 개발할 생각이다.

     

    “글꼴은 소통의 도구잖아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개인적 편차로 누구한테 잘 보이는 게 누구한테 안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 격차를 줄이는 게 제 목표예요.”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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